금요일 연재 · 제17화

두 개의 세상

수면 한 장을 사이에 둔 두 세상 — 위는 야자수와 하늘, 아래는 산호와 물고기

바바우는 하나의 섬이 아니다.

오십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다.

지도에서 보면 초록색 조각들이 물 위에 흩뿌려져 있고, 그 사이를 물길이 미로처럼 지난다.

며칠에 걸쳐 그 섬들을 다닌다.

혼자다.

아침에 부두로 나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태워주면 탄다.

어부의 보트, 물자를 나르는 작은 배,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배.

요금을 받는 배도 있고 안 받는 배도 있다.

안 받는 쪽이 더 많다.

어느 섬에 내려 반나절 걷다가 다음 배를 기다린다.

배가 안 오면 그냥 더 있는다.

돌아갈 시간을 정해두지 않으니 놓칠 배도 없다.

섬마다 다르다.

어떤 섬은 사람이 살고 교회가 하나 있다.

어떤 섬은 야자수와 새뿐이다.

어떤 섬은 물이 너무 얕아 배가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고, 거기서부터 걸어 들어간다.

허리까지 오는 물을 걸어서 해변에 닿는다.

신발은 손에 들고 간다.

신발을 손에 들고 허리까지 오는 물을 걸어 해변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런 섬 하나에서, 마스크를 쓰고 물에 들어간다.

무인도 해변에서 마스크를 쓰고 물로 들어가는 청년

물이 따뜻하다.

뉴질랜드 바다와 다르다.

그 바다는 오월에도 이가 시렸다.

여기 물은 체온과 비슷하다.

들어가는 순간 경계가 사라진다.

어디까지가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피부가 그 경계를 잃는다.

허리를 숙인다.

세상이 바뀐다.

수면 아래에 도시가 있다.

산호다.

자주색, 연두색, 갈색, 노란색.

뇌처럼 주름진 것, 사슴뿔처럼 뻗은 것, 부채처럼 펼쳐진 것, 탁자처럼 평평하게 자라 그늘을 만든 것.

그것들이 겹치고 포개져 골목을 만든다.

골목마다 물고기가 산다.

파랑, 노랑, 줄무늬, 형광.

다가가면 흩어졌다가 멈추면 다시 모여든다.

수면 아래 펼쳐진 산호의 도시와 골목마다 사는 물고기들

빛이 다르게 온다.

수면의 물결이 렌즈가 되어 햇빛을 쪼갠다.

쪼개진 빛이 모래바닥에 그물무늬를 그린다.

그 무늬가 계속 흔들린다.

산호 위로, 물고기 위로, 내 손등 위로 같은 무늬가 지나간다.

손을 들어보면 손도 그 무늬 안에 있다.

모래바닥에 흔들리는 빛의 그물무늬와 그 안에 든 손등

처음엔 고요한 줄 알았다.

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딱, 딱, 따다닥.

사방에서 아주 작게.

처음엔 귀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안다.

아니다.

산호 밑에서 나는 소리다.

무엇이 내는 소리인지 그때는 모른다.

나중에 새우 종류가 집게를 딱거리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

수십만 마리가 동시에.

산호 밑에서 사방으로 번지는 아주 작은 딱딱거림

없다고 생각한 곳에 있었다.

숨을 참고 조금 더 내려간다.

산호에 손이 닿을 듯 가까워진다.

물고기 한 마리가 눈앞에서 멈춰 나를 본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눈이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쫓기며 살지 않았다.

그물도, 낚싯바늘도 겪지 않은 눈이다.

숨이 다할 때까지 그 눈을 마주 본다.

폐가 조여오면 올라온다.

숨을 참은 얼굴 앞에 멈춰 서서 마주 보는 물고기

허리를 든다.

수면 위의 세상이 돌아온다.

하늘.

구름.

야자수.

바람.

새소리.

파도가 산호 자갈을 굴리는 소리.

볕이 어깨를 태운다.

허리를 들자 돌아오는 하늘과 야자수, 어깨를 태우는 볕

허리를 숙인다.

산호.

물고기.

흔들리는 그물무늬.

딱, 딱, 따다닥.

허리를 든다.

하늘.

바람.

소리.

두 개의 세상이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수면 한 장이다.

두께가 없다.

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두 세계가 서로를 모른다.

위에서는 아래가 안 보이고, 아래에서는 위가 흔들리는 은색으로만 보인다.

바람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딱딱거리는 소리는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오십 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두께 없는 수면 한 장을 경계로 갈라진 두 세계

그런데 나는 그 사이를 오간다.

허리 하나로.

몇 번이고 숙였다 든다.

손끝이 쭈글쭈글해지고 어깨가 따가워지도록.

시간을 재는 일은 배 위에서 끝났다.

여기서는 해의 높이로만 시간을 안다.

21일 동안 바다는 적이었다.

파도, 바람, 뒤집어지는 배,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구역질.

바다는 나를 삼키려 했고 나는 그걸 견뎌야 했다.

같은 바다가 여기서는 나를 안아준다.

같은 물, 같은 소금, 같은 파도다.

바다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내가 그 안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다.

같은 바다의 다른 얼굴 — 삼키려 들던 파도와 안아주는 물

나는 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서울에서 뉴질랜드로, 뉴질랜드 어느 도시에서 어느 도시로 그러다가 바다로, 바다에서 여기 섬으로.

건너가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건너갈 때마다 등 뒤가 가벼워졌다.

그런데 여기 이 물에서는 건너가지 않는다.

오간다.

숙이면 이쪽, 들면 저쪽.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어느 쪽에도 갇히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이 먼저 배운다.

오십 센티미터 아래위로.

해변으로 돌아와 나무 그늘에 눕는다.

젖은 몸에 바람이 닿아 서늘하다.

파도 소리를 듣는다.

이번에는 두렵지 않은 파도 소리다.

21일 동안 그 소리는 밤마다 나를 깨우던 소리였다.

지금은 자장가처럼 들린다.

나무 그늘에 누워 젖은 몸으로 파도 소리를 듣는 청년

해가 기운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분홍색으로, 보라색으로 바뀐다.

야자수가 실루엣이 된다.

남태평양의 일몰은 느리다.

서두르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해가 다 질 때까지, 그 색이 다 바뀔 때까지 그냥 앉아서 본다.

주황에서 보라로 바뀌는 하늘과 실루엣이 된 야자수

배를 얻어 타고 네이아푸로 돌아온다.

게스트하우스 발코니에 앉는다.

항구에 정박한 요트들의 돛대가 흔들린다.

맥주를 하나 산다.

차갑다.

배 위에서는 차가운 맥주가 없었다.

미지근한 물조차 배급이었다.

게스트하우스 발코니에서 차가운 맥주를 든 채 바라보는 항구의 돛대들

한국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무너질 만큼 무너진 뒤였다.

어디론가 가야 했다.

멀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그래서 뉴질랜드로 갔고, 요트를 탔고, 바다를 건넜고, 여기까지 왔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제 떠나지 않아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되었다.

돌아가자.

두렵지 않다.

바바우가 채워준 것만으로도 여행 없이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 바다.

이 바람.

이 사람들.

담배 한 갑에 실려 온 크레이피시.

개와 싸우던 이반의 뒷모습.

카타마란 갑판에 널린 셔츠 두 장.

딱, 딱, 따다닥.

그리고 부러진 낚싯대.

배낭 안에 손잡이 쪽만 남은 채로 들어 있다.

십자로 홈이 파인 금속 버트가 배낭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다시 들고 돌아오라고 했다.

부러진 것을 들고 가야 한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 집 문을 두드리면 그는 또 문을 열 것이다.

두 번 그랬으니 세 번도 그럴 것이다.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손으로 어깨를 붙잡고, 들어와 씻고 자라고 할 것이다.

배낭 밖으로 삐져나온 부러진 낚싯대의 금속 손잡이

충분하다.

가득 찼다.

비행기를 타려면 수도로 가야 한다.

바바우와 누쿠알로파 사이에는 정기선이 다닌다.

일주일에 몇 번, 사람과 화물을 함께 싣고 이틀에 걸쳐 간다.

부두 사무소에서 표를 산다.

종이 한 장에 손으로 날짜를 적어준다.

부두 사무소에서 손으로 날짜를 적어 건네는 정기선 표

출항은 모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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