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스노클링할 데를 묻는다. 마스크와 스노클을 빌린다. 길을 따라 걷는다. 산호 자갈길, 코코넛 야자수, 판다누스 나무. 발밑에서 산호 부스러기가 밟히는 소리가 난다. 통가 아이들이 맨발로 놀다가 손을 흔든다. "Mālō e lelei!" 뜻은 모르지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든다.
해변에 도착한다. 산호 모래, 약간 거칠고 약간 분홍빛이 도는. 파도가 얕게 밀려왔다 밀려간다. 마스크를 쓰고 바다에 들어간다.
따뜻하다. 뉴질랜드 바다와 다르다. 그 바다는 오월에도 이가 시렸다. 여기 물은 체온과 비슷한 온도다. 들어가는 순간 경계가 사라진다. 어디까지가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피부가 그 경계를 잃는다.
허리를 숙인다. 세상이 바뀐다.
수면 아래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산호. 자주색, 연두색, 갈색, 노란색. 뇌처럼 주름진 것, 사슴뿔처럼 뻗은 것, 부채처럼 펼쳐진 것. 그 사이를 열대어들이 지나간다. 파랑, 노랑, 줄무늬. 다가가면 흩어졌다가, 멈추면 다시 모여든다. 소리가 없다. 그 아래는 완전한 고요다.
숨을 참고 조금 더 내려가 본다. 산호에 손이 닿을 듯 가까워진다. 물고기 한 마리가 눈앞에서 멈춰 나를 본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눈이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쫓기며 살지 않았다. 그물도, 낚싯바늘도 겪지 않은 눈이다. 숨이 다할 때까지 그 눈을 마주 본다. 그러다 폐가 조여오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온다. 물을 뱉고,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려간다.
허리를 든다. 수면 위의 세상이 돌아온다. 하늘, 구름, 야자수, 바람. 새소리, 아이들 소리, 파도 소리.
허리를 숙인다. 수면 아래의 세상. 산호, 물고기, 고요.
허리를 든다. 하늘, 바람, 소리.
두 개의 세상이다. 그 경계는 허리다. 숙이면 바다, 들면 하늘. 숙이면 고요, 들면 바람. 숙이면 색, 들면 빛.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은 오직 허리 하나의 움직임이다. 몇 번이고 숙였다 든다. 두 세상을 번갈아 드나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손끝이 쭈글쭈글해지고, 어깨가 햇볕에 따갑도록 오래. 시간을 재는 일은 배 위에서 끝났다. 여기서는 해의 높이로만 시간을 안다.
21일 동안 바다는 적이었다. 파도, 바람, 뒤집어지는 배,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구역질. 바다는 나를 삼키려 했고, 나는 그걸 견뎌야 했다. 그런데 같은 바다가 여기서는 나를 안아준다. 같은 물, 같은 소금, 같은 파도. 오직 온도만, 오직 상황만 달라졌을 뿐이다. 바다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내가 그 안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다.
해변으로 돌아와 나무 그늘에 눕는다. 젖은 몸에 바람이 닿아 서늘하다. 바나나를 하나 더 먹는다. 파도 소리를 듣는다. 이번에는 두렵지 않은 파도 소리다. 21일 동안 그 소리는 밤마다 나를 깨우던 소리였다. 지금은 자장가처럼 들린다.
한국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벤처가 망하고, 이혼하고, 모든 게 무너진 뒤에. 요트를 얻어 탔고, 21일을 바다 위에서 버텼고, 여기에 왔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평생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 전통시장에서 바나나를 줄기째 사고, 허리 높이의 바다에서 산호를 들여다보는 오후.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여긴 자리에서, 이런 오후가 온다.
무너진 것들은 여전히 무너진 채로 한국에 있다. 회사도, 결혼도, 돌아가면 감당해야 할 것들도. 그런데 여기, 이 물속에서는 그것들이 멀다. 손을 뻗으면 산호가 있고, 물고기가 있고, 지금이 있다. 무너진 것들은 이 물 밖의 일이다.
도망자의 발이 닿은 곳이 파라다이스다.
해가 기운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분홍색으로, 보라색으로 바뀐다. 야자수가 실루엣이 된다. 남태평양의 일몰은 느리다. 서두르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해가 다 질 때까지, 그 색이 다 바뀔 때까지 그냥 앉아서 본다.
게스트하우스 발코니에 앉는다. 항구에 정박한 요트들의 돛대가 흔들린다. 맥주를 하나 산다. 차갑다. 배 위에서는 차가운 맥주가 없었다. 미지근한 물조차 배급이었다. 차가운 맥주 한 캔이 이렇게 사치일 수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배운다.
내일도 계획이 없다. 모레도. 글피도.
좋다. 그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