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지대 사흘째, 기압계가 떨어진 그날 밤이다. 바람이 돌아온 것과 같은 밤에, 하늘도 함께 변했다.
열 시부터 혼자다. 콕핏에 앉아 남십자성을 보며 핸들을 잡는다. 이제는 밤 당직이 손에 익었다. 여느 밤이라면 이 시간이 고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밤은 다르다. 낮에 이반이 기압계를 두 번 두드리던 것, 숫자를 확인하고 표정이 굳던 것이 자꾸 떠오른다. 그러다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한다. 맡은 일은 멀리서 화물선이 오는지 보는 것, 그거 말고는 없다고 들었다. 세일이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펄럭이는 소리에 겁이 난다. 이미 바람이 거세다. 선실로 내려가 이반을 깨울 생각은 할 수 없다.
파도가 금방 높아지기 시작한다. 구명조끼를 입는다. 안전띠를 건다.
파도는 곧 마스트보다 높아진다. 골짜기로 내려갈 때는 하늘이 사라지고 검은 물벽만 보인다. 바람은 비명이 아니다. 비명은 사람이 지르는 것이다. 이건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다. 로프를 온 힘을 다해 움켜쥔다. 손바닥이 파이며 로프가 살을 벤다. 소금물이 그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 아프다. 하지만 무감각하다. 살아있다는 것만 안다.
첫 번째 파도가 덮친다. 와장창, 배 전체가 물에 잠긴다. 온몸이 젖는다. 파도는 주기적으로 배를 때리고 나를 때린다. 혼내는 것 같기도, 씻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공포가 밀려든다. 공포라는 파도를 타고 또 다른 공포의 기억이 덮친다.
1991년 오월, 명동. 늦은 오후, 거리엔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도로를 점거한 대열이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다가, 앞쪽에서 함성이 아니라 비명이 들렸다. 대열이 갈라졌다. 방패와 곤봉을 든 전경들이 정면에서 밀고 들어왔고, 동시에 골목 양쪽에서 사복 차림의 백골단이 쏟아졌다. 흰 헬멧, 청재킷, 손에 쥔 짧은 쇠파이프. 그들은 대열의 허리를 끊고 사람들을 좁은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토끼몰이라고 불렀다. 토끼처럼 궁지에 몰아넣고 잡는다고.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다. 최루가스가 눈과 목을 태웠다. 시야가 하얗게 흐려진 채로 뛰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냥 사람들이 뛰는 방향으로. 발밑에 벗겨진 신발이 있었다. 넘어진 사람을 밟지 않으려고 발을 크게 벌려 뛰었다. 등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쇠파이프가 뭔가를 때리는 소리. 그리고 비명.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잡힌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았다.
골목 끝에서 담을 넘었다. 어느 집 마당에 떨어졌다. 개가 짖었다. 숨을 몰아쉬며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최루가스에 젖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날 밤 뉴스에서, 그리고 다음 날 신문에서,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물셋, 나와 동갑. 쇠파이프에 뒤통수를 맞고 골목 한가운데서.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다만 그가 뛰던 방향이 나와 같았을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았다.
두 번째 파도, 와장창. 이번엔 준비했다. 파도가 오는 걸 보고 키를 왼쪽으로 튼다. 배가 비껴서고 파도가 옆구리를 스친다. 덜 맞는다.
1992년, 종로. 시위대 행렬이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길게 이어졌다. 만장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대열 한가운데서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양옆 골목에서 백골단이 쏟아져 나왔다. 뱀의 머리를 자르듯이, 선두 바로 뒤를 끊어놓았다. 페퍼포그 차량이 골목 입구에 자리를 잡고 최루액을 뿌리기 시작했다. 하얀 안개가 거리를 덮었다. 의장단이 고립되고 전투조들이 앞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대열이 술렁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대중간부 없어요? 시위대 이끌 사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짧은 정적이 있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를 가리켰다. "부총이 여기 있어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건장한 사내 둘이 다가와 양쪽에서 어깨를 받쳐 목마를 태웠다. 시야가 갑자기 높아졌다. 최루가스 안개 위로 수천 개의 머리가 보였다. 목이 터지도록 구호를 외쳤다. 수천 명이 그 구호를 따라 외쳤다. 동대문까지, 그 긴 행렬이 함성으로 흔들렸다. 전경들과의 격돌이 페퍼포그 안개 속에서 계속됐다. 누가 맞고 누가 끌려가는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파도는 옆구리에서 온다. 키를 반대로 틀자 배가 파도 위로 올라탄다.
1993년, 시청앞 육거리. 그날은 아지트를 뜨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여섯 개 골목에 사람이 나뉘어 숨어 있었다. 세 골목엔 시위대, 나머지 세 골목엔 전경과 백골단. 첫 구호를 외치는 역할이 주어졌다. 그 한마디가 신호였다. 신호가 떨어지면 여섯 골목의 균형이 동시에 깨진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육거리 한가운데 섰다. 사방이 고요했다. 이 고요를 깨는 순간, 백골단도 동시에 나를 향해 달려들 것이었다. 마이크를 든 손이 떨렸다. 입을 열려는 찰나, 망설임이 반 박자 길어졌다.
그 반 박자 사이,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독재 타도!" 그의 목소리가 육거리를 갈랐다. 여섯 골목이 동시에 열렸다. 백골단이 그 목소리를 향해 파도처럼 덮쳤다. 그를 향해. 내가 아니라.
그때 진짜 파도가 옆구리를 친다. 와장창. 물벼락. 정신이 돌아온다. 여기는 명동이 아니다. 종로도, 시청앞도 아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200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