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백년연구소 남태평양 요트세일링 · 원문 그대로
남태평양 요트세일링 · 금요일 연재 · 02화

2화. 팡가레이 (회상)

푸른 낙타 작 · 연작소설

배를 구하기 석 달 전으로 돌아간다.

2001년 2월, 팡가레이. 오클랜드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을 달리면 나오는 항구였다. 민물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그 강어귀를 따라 마리나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일일 정박료가 싸서, 대양을 건너온 배들이 다음 대양을 건널 채비를 하며 여기 모여들었다. 남태평양으로 나가려는 배들의 마지막 육지, 혹은 남태평양에서 돌아온 배들의 첫 육지. 팡가레이는 그런 항구였다.

부두에는 돛대가 숲처럼 서 있었다. 수십 척, 어쩌면 백 척이 넘었다. 아침이면 그 돛대들이 옅은 안개 속에서 검은 선으로 떠올랐고, 밧줄이 마스트를 때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낮게 울렸다. 뎅, 뎅.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리가 조금씩 어긋나며 겹쳤다. 배들은 저마다 다른 깃발을 달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성조기, 처음 보는 삼색기들. 어떤 배는 새것처럼 반짝였고, 어떤 배는 페인트가 벗겨진 채 물때가 앉아 있었다. 그 낡은 배들이 대개 더 멀리서 온 배들이었다.

매일 아침 그 부두로 나갔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배를 구경하고, 마리나 옆 펍에 들러 게시판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게시판에는 압정으로 고정된 쪽지들이 바람에 팔랑였다. crew를 구한다는 쪽지, crew 자리를 찾는다는 쪽지. 나도 한 장 붙여 두었다. 서툰 영어로, 한국에서 왔고, 경험은 없지만 뭐든 하겠다고. 매일 그 쪽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crew라는 건 단순했다. 밤에 망을 봐주고, 갑판을 청소해주고, 그 대가로 공짜로 배를 얻어 탄다. 경험이 없어도 됐다. 필요한 건 몸 하나와, 겁먹지 않는 것뿐이었다. 저 배들 중에는 세계일주를 하는 것도 있다고 했다.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서, 몇 년째 항구에서 항구로 옮겨 다니는 사람들. 부두를 걸으며 그 배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어느 배가 나를 태워줄지는 알 수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배를 구하는 일은 대개 거절로 이루어졌다. 어떤 배는 crew가 이미 찼고, 어떤 배는 가는 방향이 맞지 않았고, 어떤 선장은 경험 없는 아시아인을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거절은 대개 말이 아니라 표정으로 왔다. 위아래로 한번 훑고, 고개를 젓고, 돌아서는 것. 그 표정에는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도 매일 부두로 나갔다. 달리 갈 곳도 없었다.

저녁이면 세일러들이 모이는 펍에 앉아 있었다. 볕에 그을린 얼굴들, 손등의 굳은살, 술에 젖은 항해 이야기들. 어느 배가 어느 해협에서 돛을 잃었고, 누가 어느 환초에서 좌초할 뻔했고. 영어는 절반쯤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 절반만으로도 바다가 어떤 곳인지 조금씩 짐작이 갔다. 무섭고, 멀고, 그런데도 자꾸 사람을 끌어당기는 곳.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하루가 지나갔다.

캠핑장 옆 사이트에 캠핑카가 있었다. 삼십대 중반쯤 되는 남자가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금발, 덥수룩한 수염, 볕에 탄 팔.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었다.

"Hey!" "혼자야?" "네." "어디서 왔어?" "한국요." "아, 한국!"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애드먼드야. 영국에서 왔어."

애드먼드가 맥주를 하나 건넸다. "마셔. 여행자끼리." 받아 들었다. 캔을 땄다. 차가웠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워킹홀리데이로 뉴질랜드에 온 지 육 개월, 이제 비자가 끝나간다고 했다. "다음 나라로 가야 해." "어디로요?" "통가." "통가?" "응. 요트 타고."

맥주를 내려놓았다. "요트요?" "응. 여기 항구에서 crew 구하는 배들 많아. 알아?" "…" "모르면 내일 같이 가. 소개해줄게."

그도 나처럼 배를 찾고 있었다. 비자가 끝나가는 남자와, 돌아갈 곳을 정하지 못한 남자. 처지는 달랐지만 서 있는 자리는 같았다. "Crew 자리 찾아?" "네." "나도. 같이 찾자." 우리는 그렇게 한 편이 되었다.

그날부터 함께 다녔다. 낮에는 마리나에서 배들을 살피고, 저녁에는 펍을 돌았다. 애드먼드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농담을 던지고, 이름을 외우고, 맥주를 샀다.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면 슬쩍 웃음으로 돌렸다. 누구와도 십 분이면 친구가 됐다. 나는 그 옆에서 주로 들었다. 영어가 서툴렀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멀리 가고 싶다는 것, 그것 하나는 분명했다. 그 하나 때문에 매일 그 부두에 서 있었다.

돛대들 사이로 해가 지면, 물 위에 돛대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그 그림자들이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저 배들 중 하나가 나를 태워 어디론가 데려갈 수도 있다는 것. 그 하나를 기다리며 하루가, 또 하루가 지나갔다. 이반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