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백년연구소 남태평양 요트세일링 · 원문 그대로
남태평양 요트세일링 · 금요일 연재 · 15화

15화. 돌아가자

푸른 낙타 작 · 연작소설

항구에는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바바우는 남태평양 항해의 중간 기착지, 세계 각지에서 온 스키퍼들이 여기서 쉬었다가 다음 목적지로 떠난다. 그들 중 몇 명과 어울리게 된다. 저녁이면 발코니나 부두에 모여 맥주를 마신다. 대부분 50대 이상, 부부가 많다.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회사를 운영했고, 자녀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에 요트를 사서 떠났다는 것.

"은퇴가 아니에요. 졸업이에요." 영국에서 온 남자가 말한다. 제조업을 30년 했고, 아들에게 넘겨주고 아내와 3년째 항해 중이다. "가장 어려운 건 회사 키우는 게 아니라 물려주는 거였어요. 내가 다 해왔으니까. 놓는 게 어려웠어요."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손을 놓는 데 십 년이 걸렸어요. 회사를 만드는 것보다 더."

남아프리카에서 온 부부는 와이너리를 운영했다고 한다. 딸에게 넘기고 2년째다. "딸이 나보다 잘해요." 남자가 웃으며 말한다. "아버지가 밑에 있으면 잘 못해요. 떠나줘야 해요." 아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떠나주는 것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라는 듯이.

맥주를 마시며 그 이야기들을 듣는다. 한국에서는 없는 이야기다. 창업자가 살아 있는데 자녀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것. 한국에서는 죽을 때까지 회장이 회장이었다. 물러나는 게 아니라 빼앗기는 것, 승계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법정에서 만나고, 형제가 지분을 두고 갈라서고, 그런 이야기라면 신문에서 매년 읽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자기가 만든 것을 자녀에게 넘겨주고 바다로 나온 이야기를. 자유롭다.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

요트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이야기도 듣는다. 배를 몰고 다른 사람의 요트를 지정된 항구까지 배달해주는 직업, 딜리버리 스키퍼. 배 한 척을 통째로 맡아 대양을 건너 넘겨주고, 다음 배를 기다린다는 것.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 며칠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반의 배에서 21일간 고생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바다가 그리운 것이다. 배멀미로 죽을 것 같던 밤들, 혼자 서던 새벽 당직, 그 모든 걸 겪고도 다시 바다가 그립다. 바다는 그런 것이다. 사람을 삼키려 들다가도, 떠나온 뒤에는 다시 부른다.

어느 날 오후 네이아푸 시내를 걷다 소란을 듣는다. 남자가 개와 싸우고 있다. 떠돌이 개 한 마리가 짖고,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이반이다.

21일간 나를 부려먹었던 이반, 규칙의 남자, 바다 위의 독재자. 내 주방은 안 된다던 남자, 낚싯대를 발로 밟아 부러뜨린 남자. 그 남자가 길가에서 떠돌이 개와 막싸움을 하고 있다. 개가 자기를 향해 짖는다는 이유로. 손을 휘젓고, 발을 구르고, 개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

한참 서서 지켜본다. 웃음이 난다. 이 남자도 그냥 사람이다. 바다 위에서는 선장이었지만, 땅 위에서는 개한테 화를 내는 남자. 21일간 쌓였던 원망이 그 우스운 풍경 속으로 빠져나간다. 말을 걸지 않고 그냥 돌아선다. 인사도, 원망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바바우에서의 날들이 쌓인다. 아침마다 해산물이 오고, 낮에는 바다에 들어가고, 저녁에는 요트 사람들과 맥주를 마신다. 어느덧 뉴질랜드를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한국을 떠난 지는 1년이 훌쩍 넘었다.

어느 저녁, 발코니에 앉아 해가 지는 걸 본다. 매일 보는 풍경인데, 그날따라 다르다. 채워졌다는 느낌이다. 오래 비어 있던 그릇에 무언가가 가득 찬 것 같은.

한국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벤처가 망했다. 이혼했다. 모든 게 무너졌다. 어디론가 가야 했다. 멀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그래서 뉴질랜드로 갔고, 요트를 탔고, 바다를 건넜고, 여기까지 왔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그 마음이 다 차 있다.

세상에는 두 개의 세상이 있다는 걸 바다 속에서 배웠다. 허리를 숙이면 수면 아래의 세상, 들면 수면 위의 세상. 어디에 속할지는 늘 내 선택이었다.

돌아가자.

두렵지 않다. 바바우가 채워준 것만으로도, 여행 없이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 바다. 이 바람. 이 사람들. 담배 한 갑에 가져다준 크레이피시. 개와 싸우던 이반의 뒷모습. 요트 위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얼굴.

충분하다. 가득 찼다.

이제 돌아가자.